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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발간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佛敎書館)에서 발간한 한용운의 불교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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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는 일찌기 불교 유신(維新)에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성산(成算)을 지니고도 있었다. 다만 일이 뜻 같지 않아 당장 세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한 무형의 불교의 새 세계를 자질구레한 글 속에 나타냄으로써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고자 한 것뿐이다. 무릇 매실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養生)의 한 방법이긴 할 것인바 이 논설은 말할 것도 없이 매실나무의 그림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 이 전신을 이렇게 태우는 바에는 부득불 이 한 그루 매실나무의 그림자로 만석(萬石)의 맑은 샘 구실을 시킬 수밖에 없는가 한다. 요즘 불가(佛家)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 터인데 알지 못하겠다 우리 승려 동지들도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지. 과연 느끼고 있다면 이 매실나무 그림자로 비춰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섯 바라밀다(六波羅蜜多) 중 보시(布施)가 제일이라고 들었다. 나도 이 매실나무 그림자나마 보시한 공덕으로 지옥쯤은 면하게 될까 어떨까.


1910년 12월 8일 밤
저자 씀.

1914년 『불교대전(佛敎大典)』발간

한용운이 범어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고 이를 간추려 1914년 범어사에서 편찬한 현대적 불교 교리의 지침서. 이 책은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뒤인 1912년부터 통도 사에서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고 그 가운데에서 1,000여부의 경·율·론으로부터 중요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불교유신론에 입각해서 불교의 전통을 현대적 상황에 맞추어 편찬한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제1서품(序品), 제2교리강령품, 제3불타품, 제4신앙품, 제5업연품, 제6자치품, 제7대치품, 제8포교품, 제9구경품으로 되어 있고, 다시 장과 절로 세밀하게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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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유심(惟心)》창간

창간사 〈처음에 씀〉을 보면, “배를 띄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 바람의 굳셈이랴. 서리 아래에 푸르 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느니라. / 미(美)의 음(音)보다도 묘한 소리, 거친 물결에 돛대가 낮다. / 보느냐.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千萬)의 장 애(障碍)를 타파하고 대양(大洋)에 도착하는 득의(得意)의 파(波)를. / 보이리라 우주의 신비(神秘).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라고 적었다. 이밖에도 한용운은 시 「‘심(心)’」,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고통과 쾌락’」·「‘고학생’」·「‘전로를 택하여 진하라’」 등을 발표했다. 2호에는 「‘고통과 쾌락’」, 3호에는 「‘천연(遷延)의 해(害)’」, 「‘무용 (無用)의 노심(勞心)’」 등의 논설을 실었다. 한용운의 글쓰기가 이 시기부터 대중계몽을 목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잡지가 불교 전문지를 표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창간호부터 나온 ‘현상문예작품’ 광고를 통해 확인된다. 제3호에 발표한 선정 결과를 보면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학생 소설 「고학생」(상금 1원)과 시 「마음」(상금 50전)으로 당선했고, 논문 「현대청년에게 정(呈)하는 수양론」이 선외가작에 들었다. 김형원(金炯元), 이중각(李重珏)의 시가 선외가작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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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1919년 3월 1일 한용운은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한 후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첨가하였으며,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大要」(속칭 조선 독립의 서)를 기초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은 한용운의 민족의식 과 자주독립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명논설로 유명하다. 이해 8월 9일 경성 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1922년 3월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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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발간

1925년 6월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탈고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법보회(法寶會)에서 발간했다. ‘십현담’이란 당나라의 동안 선사가 선(禪)의 원리를 10개의 주제어에 해당하는 십현(十玄)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그 각각의 의미를 시(詩) 형식의 게송으로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심인(心印)-조의(祖意)-현기(玄機)-진이(塵異)-불교(佛敎)-환향곡(還鄕曲)-파환향곡(破還鄕曲)-회기(回機)-전위(轉位)-정위전(正位前)을 말하는데, 심인에서 불교까지 5수는 종문의 요지를 서술한 것이며, 환향곡에서 정위전까지 5수는 실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동종(曺洞宗)의 입장에서 선의 원리와 수행 과정을 말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해 청량문익(淸凉文益, 885~958) 선사가 주석을 붙인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에도 전래되었다.

김시습의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는 발간 연도를 알 수 없지만, 매월당 자서(自序)에 1475년에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산중으로 들어 중옷을 입고 오세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이 책은 김시습의 자서(自序)와 본문, 그리고 부록인 조주삼문(趙州三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언해본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한용운은 김시습(金時習)의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접한 후 과거의 주석과 다르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석서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주석서가 바로 『십현담주해(十玄談註 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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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新幹會) 운동

1927년 2월 민족 단일 노선을 지지하면서 민족운동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가 신간회(新幹會)다. 안재홍(安在鴻)·이상재(李商在)·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유억겸(兪億兼)·권동진(權東鎭)·한용운 등이 발기했다. 정강정책(政綱政策)으로는 ①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②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한 투쟁, ③ 모든 기회주의 부인 등을 내세웠다. 초대 정·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으며, 한용운은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支會)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에 항의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한용운을 비롯하여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좌익진영을 중심으로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 만에 해산되었다.

1931년 《불교(佛敎)》 발행인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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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7월 15일 창간한 조선불교계의 대표적인 잡지로 창간호부터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였다. 창간호에는 편집 겸 발행인 권상로(權相老), 인쇄인 노기정(魯基禎), 인쇄소 한성도서(주), 발행소 불교사(서울·수송동 82), A5판 78면, 정가 20전으로 표시되어 있다. 창간 당시 발행인은 권상로였으나, 1931년 6월 통권 84·85 합병호부터 1933년 7월 통권 108호까지 발행인이 한용운(韓龍雲)으로 바뀌었다. 1933년 7월 통권 108호로 휴간했다가, 1937년 3월 속간하면서 통권 호수를 ‘신제1집’으로 고쳐 1944년 12월까지 신제67집을 내면서 해방을 맞았다. 속간 당시 발행인은 허영호(許永鎬)였는데 속간 후 신제21호부터 발행인이 김삼도(金三道)·임원길(林原吉) 등으로 이어졌다. 한용운은 1931년 7월 제84·85 합병호부터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했고 편집주간을 유춘섭(柳春燮, 시인 유엽)이 맡았다. 한용운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불교》지에 기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행인이 된 뒤에는 권두언을 비롯하여 40여 편의 불교 관련 논설을 발표했다.

심우장(尋牛莊) 시대

1933년 한용운은 발행인으로 일하던 《불교》 지를 경영상 이유로 휴간하고 유숙원(兪淑元) 씨와 재혼했다. 서울 성북동 기슭에 벽산(碧山)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方應謨), 박광(朴洸) 등 몇몇 지인이 성금을 내어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거기서 기거하였다. ‘심우장 산시(散詩)’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흑풍(黑風)」, 「박명(薄命)」 등을 연재했으며 많은 논설을 남겼다. 일제가 강제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획책하자 박광(朴洸), 이동하(李東厦) 등과 반대운동을 벌였고, 조선인학병(朝鮮人學兵) 출정(出征)에 반대했다. 1944년 6월 29 일(음력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火葬場)에서 다비(茶毘)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세수(世壽) 66세, 법랍(法臘)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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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진

1967년 10월 <용운당만해대선사비(龍雲堂萬海大禪師碑)>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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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향리인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1995년 추모 사당인 만해사(萬海祠)가 건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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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한용운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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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사당 만해사(祠)

1996년

설악산 신흥사 회주 무악(霧嶽) 조오현(曺五鉉) 스님이 주도하여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결성하다. 1999년 제1회 만해축전을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주관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개최하다. 2003년 만해마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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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만해기념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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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만해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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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만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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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만해사 서원보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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