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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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활동 >
일본에서 발표한 한시

1908년 4월 강원도를 떠나 일본의 신문물을 시찰하고, 일본 선종(禪宗) 본산인 조동종(曹洞宗) 대학림(大學林)에서 일본 불교계 인사들과 교유하며 4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조동종 대학림에서 발행하는 불교 잡지 《화융지(和融誌)》에 4회에 걸쳐 한시 12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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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沈黙)」

1925년 8월 설악산 오세암에서 쓰고 1926년 5월 20일 회동서관(滙東書舘)에서 간행한 첫 시집. 시집 『님의 침묵』에는 앞에 머리말에 해당하는 ‘군말’과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가 붙어 있다. 본문에는 표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복종」 등 모두 88편의 시가 배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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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저자(著者)
<독자(讀者)에게>
독자(讀者)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子孫)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菊花)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雪嶽山)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 을축(乙丑) 팔월 이십구일 밤 끝.
연작시 ‘심우장(尋牛莊) 산시(散詩)’

1936년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조선일보》에 ‘심우장(尋牛莊) 산시(散詩)’라는 표제로 7회에 걸쳐 연재한 총 15편의 연작시.
尋牛莊散詩 ① 山居 · 산꼴물 (3.27)
尋牛莊散詩 ② 矛盾 · 淺日 (3.28)
尋牛莊散詩 ③ 쥐 (3.31)
尋牛莊散詩 ④ 日出 · 海邊의 夕陽 (4.2)
尋牛莊散詩 ⑤ 江배 · 落花 · 莖草 (4.3)
尋牛莊散詩 ⑥ 旱春咏 · 海綿 (4.4)
尋牛莊散詩 ⑦ 파리 · 모기 · 半月과 少女 (4.5)

< 소설 창작 >
「흑풍(黑風)」

장편소설 「흑풍(黑風)」 은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4일까지 총 243회에 걸쳐 웅초(熊超) 김규택(金奎澤) 화백의 삽화를 곁들여 연재된다. 이 소설의 연재에 앞서 조선일보사에서는 사고(社告)를 통해 다음과 같이 소설 「흑풍」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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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재장편소설 예고>
금번 만해 한용운 선생이 본보를 위하야 흑풍(黑風)이란 장편소설을 집필하시게 되얏습니다. 4월 8일부터 본보 제4면(학예면)에 련재될 터로 날마다 여러분의 만흔 환영을 바드리라고 밋습니다. 선생은 우리 사회에 잇서 가장 존경을 밧는 선진자의 한분이요 또 가장 널리 명성을 울리는 선배의 한분입니다. 선생의 인격에 이르러는 여러분이 잘 아실터로 구구한 소개가 도리어 화사첨족(畵蛇添足)을 이루지 안할까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예술방면에 잇서서도 남이 미치지 못할 눈과 남이 따르지 못할 솜씨를 가지고 게십니다.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얏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떠한 작품에든지 그 작자의 인격이 반영되야 잇다고 합니다. <님의 침묵>에도 고결한 중 열정에 넘치는 선생의 인격으로 가득 차 잇지만 더구나 이 흑풍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도다 그러한 선생의 인격으로부터 울어나온 것이올시다.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류가 다릅니다. 좀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뿐이 아니라 심각하고도 윤택한 필치로 삽화계의 중진을 이루운 웅초 김규택 화백이 흑풍의 삽화를 답당하게 되얏습니다. 흑풍을 위하야는 실로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생각합니다.
<작자의 말>
나는 소설 쓸 소질이 잇는 사람도 아니요 또 나는 소설가 되고 시퍼 애쓰는 사람도 아니올시다. 왜 그러면 소설을 쓰느냐고 반박하실찌도 모르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동긔까지를 설명하려고는 안습니다. 하여튼 나의 이 소설에는 문장이 류창한 것도 아니요 묘사가 훌륭한 것도 아니요 또는 그외라도 다른 무슨 특장이 잇슬 것도 아닙니다. 오즉 나로서는 평소부터 여러분께 대하야 한번 알리엇스면 하든 것을 알리게 된데 지나지 안습니다. 그런대 이약이의 중심은 중국 청조 말엽 한참 다사다난하든때 무영의 풍운아 왕한(王漢)과 그의 애인이요 지긔인 한 녀자를 노코 그 당시 중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전개시키고자 합니다. 외국 사람의 이약이요 외국 사회의 이약이라 나로서도 서투른 곳이 잇고 여러분으로써도 좀 생소하게 녀기실지 모르나 엇더한 사람의 엇더한 사회를 물론하고 웃음과 함께 눈물이 잇다는 것은 똑가튼 일일듯 거긔서도 우리의 생활을 차저볼 수가 업지 안습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드리는 것은 미안하오나 이 긔회에 여러분과 친하게 되는 것은 한업시 질거운 일입니다. 만흔 졀점과 단처를 모도다 눌러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까지를 일거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이 업겟습니다.
「박명(薄命)」

《조선일보》에 1938년 5월 18일부터 이듬해인 1939년 3월 10일까지 연재한 장편소설.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소설의 연재를 광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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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의 글>
중견작가 채만식(蔡萬植) 씨의 역작인 <탁류(濁流)>는 오는 십륙일로써 화려한 끄틀 막게 되엿습니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남의 추수를 허하지 않는 본보의 소설진을 한칭 더 강력화하기 위해 다음의 작품은 만해 한용운 씨에게 집필을 청햇습니다. 씨는 <님의 침묵>의 작자로써 우리 시단에 노픈 존재일 뿐아니라 일찌기 본보에 연재된 <흑풍(黑風)>의 작자로써 만천하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 작가입니다. 씨는 <흑풍>이 끗난지 삼년 동안 심우장 문을 구지 닷고 상(想)을 고 붓을 닥거 일대의 역작을 만든 것이 바로 오는 십팔일부 조간 사면에 게재될 <박명(薄命)>이라는 장편소설입니다. 작자의 말슴에서 이 소설의 내용을 대강 짐작은 나실 줄 압니다마는 육십년간의 심각한 생활을 해온 이 작자의 눈에 비췬 현대의 모든 모양이 더구나 팔면 영롱한 필치로 아로삭여질 때 우리는 이 소설에서 커다란 인생철학을 배우리라고 밋습니다. 더구나 삽화는 우리 화단의 천재적 존재인 정현웅(鄭玄雄) 화백이 마탓습니다 이 글에 이 그림을 함께함으로 전후에 다시 엇기 어려운 청연(淸緣)입니다. 기대하십시오.
<작자의 말>
나는 일생을 통해서 듯고 본 중에 가장 거룩한 한 여성을 그려볼까 합니다. 대략 이야기의 줄기를 말하면 시골서 자라난 한 사람의 여성이 탕자의 안해가 되여 처음에는 버림을 바덧다가 나종에는 병과 빈곤을 가지고 도라온 남편을 최후의 일순간까지 순정과 열성으로 밧드는 이야기인데 이러한 여성을 그리는 나는 결코 그 여성을 옛날 열녀관념으로서 그리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처음에 먹엇던 마음을 끗까지 변하지 안코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면서 남을 섬긴다는 이 고귀하고 거룩한 심정을 그려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줄거리를 끄을고 나가면서 만약 겻가지로 현대 남성들의 가정에 잇서서의 횡포하고 파렴치한 것이라던지 또는 남녀관계가 경조부박한 현대적 상모가 함께 그려진다면 작자로써 그윽히 만족하는 바이며 또한 고마운 독자 여러분에게 그다지 초라하지 아니한 선물을 드렷다고 기뻐하겟습니다.
「죽음」

1924년 10월 24일 탈고한 작품으로 계간지 《창작(創作)과 비평(批評)》(1970, 가을호)에 소개된 유작.

「후회(後悔)」

장편소설 「후회(後悔)」는 《조선중앙일보》에 1936년 6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연재하던 중 신문의 폐간으로 중단되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후회』의 연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 씨의 역작 <인간수업>은 기왕에 보지 못한 대호평 가운데 그 결말을 수일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이 뒤를 이어 현대조선의 역사상 커다란 발자최를 뚜렸하게 색이여 누구를 말할것 없이 선배로써 경모하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씨가 수년내로 깊히 감추어 두었든 제재를 가지고 필생의 노력을 다하야 영원히 이 세상에 끼치고 남을 인간생활의 성서(聖書)가 될 바의 장편소설 <후회(後悔)>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겸하야 때마침 지령(紙齡) 천 호를 맞는 우리의 조선중앙일보사에서는 나날이 융승하야 가는 사세를 스스로 축하하는 동시에 수십만 독자 제씨에게 보내는 선물의 하나로써 특별히 이 소설을 선택한 바입니다. 작자 한용운 씨가 인생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이는 잠시동안 독자 제씨의 상상에 일임하고 현대 역사상의 거인의 붓끝은 화화(火花)와 풍우(風雨)를 일으킬 것이며 그리고 삽화는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화백이 담당하야 쌍곡협주(雙曲協奏)의 묘미를 발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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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미인(鐵血美人)」

1937년 3월 1일 《신불교(新佛敎)》를 창간하면서 《신불교》 제1집과 제2집에 걸쳐 연재하다가 중단한 장편소설.

「삼국지(三國志)」

한용운이 역술한 『삼국지(三國志)』는 1939년 11월 1일부터 《조선일보》 석간에 연재되기 시작하였지만 1940년 8월 11일 일제(日帝)에 의해 신문이 폐간되면서 281회에 그 연재가 중단된 상태로 끝난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널리 읽혔던 여러 판본의 『삼국지』와 마찬가지로 가장 정통적인 ‘모본(毛本)’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이 ‘모본’은 양백화(梁白樺)의 『삼국지』(《매일신보》 연재, 1929. 5. 5-1931. 9. 21)와 박태원(朴泰遠)의 『삼국지』(잡지 《신시대》 연재, 1941. 4-1943. 1) 등도 모두 저본으로 삼은 대표적인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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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삼국지』 연재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일보의 연재 광고를 보면 그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천하기서 삼국지 사계의 권위 한용운씨 역필(天下奇書 三國志 斯界의 權威 韓龍雲氏 譯筆)’ 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연재 광고에서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소개의 말>
“내가 아홉 살 때 삼국지를 세번 읽고 얻은 감명은 지금도 머리속에 새겨져 있다. 현대의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삼국지를 한 번씩 읽도록 한다는 것은 다만 재미있는 소설 한편을 소개한다는 좁은 범위가 아니라 실로 귀중한 한 개의 사업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니 소설이라면 의례히 속된 남녀관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요즘 세상에 있어서 한결 더 그 뜻이 무겁다고 생각된다. 내가 맡은 번역의 잘잘못은 뒤로 미루고 삼국지란 이름에서 많은 독자와 큰 기대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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