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 김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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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 김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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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金昌翕)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16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증조부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부친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모친은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은 모두 김창흡의 형이다.

 1665년 13세에 김시양(金時亮)에게 수학하였으며, 15세에는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세 되던 해에는 형 김창협과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친명(親命)으로 응시하여, 1673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75년 영암(靈巖) 적소(謫所)에 있는 부친을 누차 찾아갔고, 한계산(寒溪山), 월출산(月出山), 죽림정(竹林亭) 등을 유람하였다. 1676년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만덕산(萬德山) 백연사(白蓮寺)를 유람하고,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독서하면서, 남산에 은거하는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를 찾아 강학하였다. 1678년 부친이 양이(量移)된 철원(鐵原)으로 가서 부친을 뵙고, 겨울을 철원 보개산(寶蓋山) 대승암(大乘菴)에서 보냈다. 이듬해 냉천(冷泉)과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철원 용화촌(龍華村) 삼부연(三釜淵)에 복거(卜居)하면서 '삼연(三淵)'으로 자호(自號)하였다. 이 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후천도설(後天圖說)」을 지었다. 이후에도 용화촌의 석천사(石泉寺)를 유람하였다.

 1682년 백악(白岳) 남쪽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당시 문인들과 산수를 즐기며 시사(詩社)를 열고 지냈으며, 이 당시 김석주(金錫胄)가 인재로 천거하여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6년 한강 상류의 저자도(楮子島)를 유람하고, 이듬해 저자도의 현성(玄城)에 정자를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부친이 진도(珍島)로 유배 가서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부친의 관작(官爵)이 회복되었고, 이때 『논맹정의(論孟精義)』,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었다. 1696년에 유일(遺逸)로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양주(楊州) 석실(石室)의 송백당(松栢堂)에 머물며 김창협과 강학하였다.

 1703년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05년에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1715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717년 보개산(寶蓋山) 영은암(靈隱庵)에 머물며 제생들과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였으며, 1719년 지평 · 장령이 되었으나 상서(上書)하여 사직하였다. 이듬해, 숙종이 승하한 뒤 조정에서 복제(服制) 문제로 수의(收議)하였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1721년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설악산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을 읽었다. 신임사화로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된 후, 지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나자 포천현(抱川縣) 묘곡(卯谷)에 장사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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