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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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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金時習)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김시습의 증조부 김윤주(金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조부 김겸간(金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친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모친은 울진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은 14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세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5세 때 이미 시를 지어 신동(神童)으로 알려졌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으며,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 『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는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가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지은 많은 시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에 남아 있다. 그는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라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내불당에 기거한 일이 있었지만,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집을 나와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섰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쓴 100여 편의 시가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실려 있다. 사방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김시습의 저서로는 『매월당집』, 『금오신화』,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관호록』 등이 있으며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 33)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원호(元昊)·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김시습은 14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세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5세 때 이미 시를 지어 신동(神童)으로 알려졌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으며,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 『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는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가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지은 많은 시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에 남아 있다. 그는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라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내불당에 기거한 일이 있었지만,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집을 나와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섰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쓴 100여 편의 시가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실려 있다. 사방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김시습의 저서로는 『매월당집』, 『금오신화』,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관호록』 등이 있으며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 33)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원호(元昊)·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